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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집과 앙굴렘

작가의 집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다. 짧게는 한 달, 길면 1년까지 신청해 머물 수 있다. 나는 3개월을 신청했고, 한 달을 연장해 어느덧 4개월째 지내는 중이다.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지원 기간에 서류를 보내고, 선정되면 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 만화 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공간이라 많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곳에 머문 한국 작가들로는 수신지, 실키, 박윤선, 이정현 작가 등이 있다.


사진 1– 작가의 집 건물


작가의 집에 도착하면 레지던시 기간 동안 머물 아파트와 작가의 집 건물 안에 있는 작업실이 제공된다. 나는 스페인 작가 아나와 아파트를, 이탈리아 작가 마르코와 작업실을 함께 쓴다. 이렇게 생활 반경이 겹치는 탓에 사람들은 서로를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먼저 만나고 알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작업실을 배정할 때 서로 시너지를 낼 것 같은 사람들, 특히 성향이나 작업 테마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귀신같이 알고 한 공간에 배정한다는 점이다. 나와 함께 작업실을 공유하는 마르코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작은 출판사와 아뜰리에를 운영한다. 나도 5년 전부터 팀을 이끌며 꾸준히 공동 작업을 해 왔기에 같이 넣은 것일 거라 짐작하고 있다. 신기하게 둘 다 INFP이기도 해서, 서로를 편안해하며 지내고 있다. 옆 작업실에는 ENFP 스페인 작가 두 명이 배정되어 있는데, 온종일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하고 춤추며 아주 잘 지낸다. 그래서 레지던시 작가들끼리는 농담처럼 말한다. “작가의 집 관리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진 2- 마르코와 나의 작업실


이곳에서는 누가 유명한 작가이고, 누가 갓 학교를 졸업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모두가 내 곁에서 작업하는 동료이자 이웃일 뿐이다. 서로를 커리어와 작업으로 평가하는 페스티벌에서의 만남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함께 살아가며 작업 이전에 사람으로 먼저 서로를 알고 좋아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가 출판사를 가지고 있든, 큰 상을 받았든, 책을 몇 권 냈든 상관없다. 그저 모두가 오후 한 시가 되면 다 같이 점심을 먹는 동료일 뿐이다. 


사진 3- 다 같이 하는 점심식사


작가의 집은 총 4층으로, 행정 공간인 1층을 제외하고 2층부터 4층까지 약 스무 명의 작가들이 머물고 있다. 나는 2층 소속인데, 외국인이 많아 가장 시끄럽고 재미있는 층이다. 모두가 작업실 문을 살짝씩 열어놓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 심심해지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떠들며 논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들의 원화를 서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셈이다. 제작 과정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덕분에 일하지 않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엄청난 자극과 시너지를 얻는다.


사진 4- 프랑스 작가 르노 토마(Renaud Thomas)의 작업실


앙굴렘은 정말 작은 동네지만, 이곳에서 가끔 뉴욕이나 파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씬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동네 주민으로 막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특수효과팀으로 일한 사람도, 앙굴렘 만화축제에서 큰 상을 받은 사람도 그저 동네 사람일 뿐이다. 카페에 나가 앉아있으면 꼭 아는 사람이 한 둘씩 지나간다. 그럼 자연스럽게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만화, 애니메이션계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옆집 사람의 근황처럼 아무렇지 않게 듣는다. 작은 동네와 굵직굵직한 주민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독특한 분위기다.


사진 5- 토요일 아침마다 동네 사람들과 가지는 커피 타임


2. 외국인 중에서도 소수자


사진 6–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과 함께한 피크닉


이곳은 외국인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서로 영어로 소통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 레지던시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언어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산 지 8년 차인 나는, 이제 프랑스어가 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언어가 만들어내는 위계의 아래쪽에 놓인다. 작은 실수 하나에 프랑스어를 잘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동양인의 외모 때문에 프랑스어로 말해도 영어로 대답하는 사람들을 겪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그러한 위계가 없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소통한다. 실수해도, 말이 이상해도 서로 이해한다. 항상 긴장해야 하는 프랑스인과의 대화와는 사뭇 다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안심되는 일인지,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외국인 작가들과 프랑스 사람들의 이해되지 않는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프랑스 문화를 놀리며 웃기도 한다. 만화, 일러스트 씬에서 동양인은커녕 외국인도 귀했던 내가 살던 동네, 스트라스부르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불편하게 살아왔는지 여실히 느끼고 있다. 내가 있는 커뮤니티에 다양성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시.


그러나 이곳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나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당연히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지금 작가의 집에는 스페인어권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데, 나는 그들과 친해져서 ‘Quartier K-latino’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김치를 담그고, 조깅을 하고, 생일파티를 열고, 영화 상영회와 노래방을 개최하고, 자동차를 타고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사진 7– 작가의 집 사람들과 김장을 했다.

사진 8– 함께 바다로 떠난 여행


편안하고 재미있지만, 나를 제외하고 모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탓에 가끔 그들끼리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이해한다. 한국인이 있었다면 나도 자연스레 한국어로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신나게 이야기하다 나를 의식하고 영어로 바꿀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묘하게 외로워진다. ‘이런 안전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소수자구나. 약자구나. 여기는 프랑스고, 7년을 버텨 프랑스어가 편해졌는데 아직도 이렇게 언어로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한다니.’


가끔 내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프랑스에 살고,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편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외국인들과 더 통한다고 느낀다. 두 세계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나. 작가의 집 사람들끼리 있을 때 누군가가 어디서 왔냐고 질문하면, 본인의 국적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항상 “한국에서 왔지만, 프랑스에 살아요.”라고 답한다.


나는 프랑스 쪽인가, 아니면 외국인 쪽인가. 이곳에서도 소수자인 탓에 어디에도 완전히 편입되기 어려운 걸까. 외국인 작가들과 신나게 어울리다가도 이런 상황이 생길 때면 문득 씁쓸해진다.


3. 머무는 사람들과 스쳐 가는 사람들

작가의 집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이곳에 사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처럼 작가의 집의 유일한 세르비아인 작가 이반은 나와 그가 ‘앙굴렘의 멸종위기종’이라고 말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유럽연합국 외 나라 출신이기 때문이다.


가볍고 즐겁게 휴가를 오듯 작가의 집을 지나쳐가는 사람들과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이 나라에 정착해 보려 애쓰는 처지. 특히 비자가 필요한 비유럽 출신 작가들은 더 그러하다. 나도 원래 작가의 집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지 모르고 그저 아티스트 비자 신청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지원했던 거였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가 만화를 하기에 좋긴 하지. 그렇지만 나는 내 나라를 너무 사랑해. 그래서 돌아갈 거야.” 그런 사람들이 종종 부러워질 때가 있다. 그저 여행하듯 머물 수 있는 사람들.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문화가 있더라도 그저 몇 달만 견디며 지내도 되는 사람들. 이곳에 남을 자격을 증명해 낼 수단으로써가 아닌,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는 사람들. 나는 머물려는 사람이고, 그래서 마냥 가벼워지지 못한다. 몇 달의 레지던시를 마치고 훌훌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는 이곳에 스며들려 애쓰며 남아있다.


사진 9- 노을 지는 앙굴렘. 작가의 집 계단 위에서


앙굴렘에 사는 스페인 작가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앙굴렘은 인생 학교다.” 이곳에선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왔다가 떠나가는 리듬이 빨리 감기 되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 때문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앙굴렘에 사는 작가들과의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와 너무 친해졌다가 금방 헤어지는 것이 슬프기 때문에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것이다.


이곳의 외국인 작가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종종 내 말투와 제스처가 프랑스인답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하는 프랑스어도 너무 프랑스인 같아 알아듣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작가들과 이야기할 때면 나는 그들만 아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이 보고 자란 만화, 텔레비전 쇼, 카툰 캐릭터 등. 내가 절대 알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정서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내 작업 역시 그러하다. 한국에서 내 그림은 유럽 느낌이 난다는 말을 듣는다. 그림에서 출신 학교가 티가 난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누구보다 한국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동양화와 민화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보다 프랑스와 유럽 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그들에게 더 영향을 받는다. 다양한 작가와 작업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프랑스 작가들과 더 잘 통하지만, 절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온 것들을 완전히 익힐 수는 없다.


사진 10-작업 중인 원고


그래서 나는 경계인이다. 언젠가 경계에서 벗어나 이곳에 스며들 것을 꿈꾸면서. 그렇게 작업하고, 생활하고, 말한다. 앙굴렘의 멸종위기종으로, 프랑스와 외국인의 경계에 선 작가로. 나는 지금, 이곳 작가의 집에 있다.

 

4. 작가의 집 사람들에게 듣는 작업 조언

사진 11-단체 사진


마르틴 (아르헨티나): 이야기를 만들 때 스토리의 디테일이 아닌, 떠오르는 이미지를 먼저 따라가야 한다. 모든 것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생각하지 말아라. 이야기 쓰기를 마치면 그것은 거기 있을 것이고, 발견될 것이다. 학자가 아닌,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미구엘 (이탈리아): 건축적으로 생각하라. 공간은 많은 것을 말한다. 그 안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각하라. 플롯을 먼저 생각하고 디테일로 들어가야 한다.


르노 (프랑스): 이야기는 무척 개인적이다. 그래서 본인만이 본인이 쓸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다. 이야기의 환경을 만드는 일은 마치 건축가가 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창조해 낼 필요는 없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해라.


메디 (이란): 캐릭터를 만들 때, 항상 모든 것이 픽션일 필요는 없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얻어라.


마르코 (이탈리아): 모든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서의 자서전이다. 어떤 인물이든 나로부터 나온다.


마누엘 (아르헨티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아닌, ‘어떻게’ 말하는가이다. 그림의 재료 역시 당신이 선택하는 언어이다.


아나 (스페인): 이야기의 설정을 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 우주 전체를 다 알고 있어야 한다.

LIFE

나의 첫 레지던시

에디터 문정인

매년 세계적인 만화축제가 열리는 앙굴렘. 그곳에는 작가의 집(Maison des auteurs)이 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머물며 작업을 하는 곳. 나는 지금 이곳에 석 달째 머무는 중이다. 스페인, 아르헨티나, 프랑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이란 출신 작가들과 함께. 나의 첫 레지던시이자 첫 작업실, 그리고 수많은 외국인 작가 친구들을 만들어준 이곳, 앙굴렘 작가의 집 생활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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