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회사로 의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팅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내 이름이 적힌 편지가 놓여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정부 공식 문서나 중요한 알림 사항을 우편물로 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우편물들의 생김새에는 익숙하지만, 이 편지는 회사 로고 같은 게 없어서 개인적인 편지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뭔가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열어본 편지 봉투 속에는 나의 매니저 A에 대한 경고장이 들어있었다.
편지의 발신인은 스스로를 A의 예전 직장 동료라고 소개했다. 자신이 겪은 바에 따르면 A는 사생활에 문제가 많으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알려주려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A의 풀네임을 강조하듯 언급했으며, 그가 자신은 여성 직장 동료들과 쉽게 가까워진다고 자랑하며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파티에서 떠벌렸다고 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너무 놀랐지만 바로 근처에 동료들이 있어서 티 내지 않으려 별일 아닌 척 어색한 리액션을 해야 했다. 사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불륜과 스캔들을 빈번히 보고 듣고 겪었기에 큰 충격이 아닐 법도 한데 여전히 익숙해지긴 어려운 일이었다. 유럽에서까지 이런 일을 겪다니,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편지에서는 뒤이어 A가 직장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저질렀으며 너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HR 부서에 알려서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정이 되지 않아 바로 파트너에게 전화를 했다.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혼란스러워했지만, 이야기를 나눈 끝에 HR 부서에 따로 메일을 보내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불안을 알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러스트 1)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 나의 회사 주소와 이름, 직위를 알아내어 접근했다는 점과 편지에 적힌 자극적인 텍스트들에 놀랐지 A가 '그런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경고에는 그리 놀라지 않은 것 같다. 편지를 받은 시점은 A가 매니저로서 나와 함께 일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이미 A의 언행에서 약간 거부감을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A와 같이 회의실에 들어가면 꼭 내 옆자리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과민 반응인가 싶어서 회의 때마다 유심히 관찰해 봤지만 다른 동료 옆자리에 앉게 되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사내 다른 남자 동료들과는 이렇게 흠칫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자명했다. 한국에서의 경험 때문에 이 방면으로 촉(?)이 발달한 나는 수상쩍은 기운을 느낀 것에 대해 이미 파트너 및 친구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A와 나는 매니저-팀원의 관계 안에서도 성향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사사건건 부딪히거나 괴로움을 혼자 속으로 삭여야 하는 일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기보다는 작성한 자료, 이메일 토씨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 코멘트를 한다든지, 내가 낸 의견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웃어서 창피함을 느끼게 한다든지 하는 일이었다. 처음 맡아보는 성격의 업무를 할 때,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될지 잘 몰라서 선뜻 액션을 취하기 어렵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시간이 없어 밀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도 고민이 되어서 못 처리하고 있냐고,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하라며 날 선 훈계를 받은 일도 상처가 되었다.
일련의 마찰을 겪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나를 길들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직위에 따른 의사결정 권한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책임감과 오너십을 갖고 서로 열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수평적인 유럽 근무환경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유럽인 매니저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미 곱게 보이지 않았던 데다 편지로 경고까지 받았으니, 스트라이크였다.
HR 부서 담당자는 내 이메일을 받자마자 퇴근하려던 나를 붙잡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 대화를 통해 나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편지가 회사 사람들에게 발송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엔 HR 부서에, 그다음엔 A의 가까운 주변인들까지 포함해서, 이번에는 A와 같이 일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여자 동료들에게까지 도달한 것이다. 나 외에도 추가로 다른 팀 여자 동료 1명이 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지의 내용도 제각각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여자 동료에게 일어날지 모르는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경고가 주였다면, 다른 편지에서는 다른 사생활 문제도 언급되었다. 어쨌든 당장 다음날부터 나는 A와 외근을 나가기도 하고 긴밀하게 같이 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에, HR 부서의 담당자는 업무에 불편함이 느껴지면 뭐든지 알려달라고, 필요한 조치를 생각해 보고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미 처음 사건이 발생한 후에 회사 차원의 대처는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로만 진행되고 있으며, A가 무고하다는 가정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담당자는 내가 알기로 40대 남자와 50대 남자 두 사람이며 사건의 당사자 A는 40대 남자다. 나는 이들이 내가 느낀 감정과 불안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나는 혹시 모를 증거를 보존하듯 편지를 지퍼백에 고이 담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다.
며칠 후 나는 두 명의 담당자, 그리고 A까지 사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 대면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너무 큰 정서적 부담이 되지 않을지 고민했지만, 어쨌거나 편지를 받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앞으로 A와 계속해서 일하려면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최대한 나의 상태를 살펴봐주는 분위기 속에서 담당자 중 하나는 영락없이 회사 평판을 언급했고, 다른 담당자는 계속해서 A가 무고할지 모른다는 암시를 했다. A는 자신의 주변인에까지 편지를 보낸 때부터 괴롭힘이라고 판단하여 경찰에 신고를 접수했고 조사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담당자 중 하나는 절대로 유야무야 없던 일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듯 말했다. 필요한 자리라는 판단하에 참여했지만 그 자리엔 단 한 명의 여성 동료도 없었기에, 그리고 나 혼자만 30대 초반의 여성이었기에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A는 예전만큼 내 옆자리에 가까이 앉지 않는다. 나의 파트너도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편지가 왔으니 A가 함부로 어떤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매 순간 A를 마주할 때마다 약간의 혼란과 겹쳐오는 불안, 혹시나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어떤 날은 회사 앞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 A가 나한테 이런 짓을 했어요, 전 억울해요, 하며 하소연하는 상상을 한다. 어쩌다 A와 출퇴근길이 겹쳐 대중교통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면 지켜보던 누군가가 저 사람이 타깃이구나, 하고 나를 특정하는 상상을 한다.
(일러스트 2)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동료를 사무적으로만 대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내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때로는 사생활도 공유할 만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타입인 나는 때때로 A와 농담을 해야 할 때,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주저하게 된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야무지고 어른스럽고 ‘주니어’같지 않은 성숙한 처신인지 고민함과 동시에 솔직하고 감성적인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것 사이에서 정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몇 주가 지났지만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었다. 이대로 잊히나 싶어 나는 다시 담당자에 메일을 보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사에서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A의 범죄경력을 조회했지만 별다른 이력이 없었고, A는 아무래도 소셜미디어에서 경력 사항을 등록한 것이 화근인 것 같아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고 한다. 또한,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어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다니, 정말 결백하다면 그럴 수 있을까? A는 나의 평가자이기 때문에 고과 관련 피드백이 진행 중인데, 과연 그가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분명 A에게 나는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자신의 치부를 아는 거슬리는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적으로 A와 나, 둘 중 하나를 회사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은 경력도 많고 채용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 A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당당해야 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업데이트를 요구하면서도 회사로부터 언젠가 내쳐질지 모른다는 잔잔한 불안 속에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사건은 진행 중이고 용의자를 찾지 못하는 한 영원히 사건의 종결은 없을지 모른다. 한 사람의 여성 직장인으로서 나의 표면적, 내면적 투쟁 또한 진행 중이다. 약자를 주저앉히고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게 더 쉬운 세상에서 나는 한 번쯤은 지지 않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
CAREER
당신의 매니저를 조심하세요
글 동그라미 | 그림 이예현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익명의 편지에서 시작된 이방인 여성 직장인의 투쟁.
*글쓴이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거주 지역과 이름은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