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나는 이방에서 총 세 번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동생이 고등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머물었던 미국 홈스테이 집에 나 혼자 방문했던 일. 두 번째는 두바이에서 열린 동생의 결혼식. 세 번째는 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 우리 집으로 놀러 왔을 때였다. 동생은 3년간의 아랍에미리트 파견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정착한 지 만 6년이 되었다. 12년 동안 독일에 있는 언니 대신 K장녀의 역할도 맡아온 동생과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1. 두바이에서 가족과 함께
우리의 해외 생활 시작은 어땠더라?
언니 / 네가 고등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가족도 없이 혼자 가는데 안 무섭나?’ 싶었거든. 아랍에미리트로 파견 간다고 했을 때도 놀랐어. 네가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의 취업 면접을 보고 와서 어땠는지 이야기해 줬을 때도 생각나. 환자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해야 하는 처치와 그 이유를 똑 부러지게 대답했더라고. 네가 진짜 간호사라는 걸 새삼스럽게도 처음 느꼈어. 참 멋졌지.
동생 / 언니가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는 사실, ‘미국이야 내가 갔다 왔으니까 언니도 가나보다.’ 했는데 유럽여행을 떠나는 걸 보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 마치 맨 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 후 독일에 간다고 했을 때, 궁금해지더라고.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다 왜 갑자기 독일로 떠다는 건지.
언니 / 맞아. 한국에서는 공사에서 인턴도 하고, 독일에 오기 전엔 연구원에 다녔는데, 거기서 일한 게 나에게 다른 관점을 갖게 했던 것 같아. 연구원에 일하는 동료 대부분이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선후배가 같이 일하는 분위기였어. 팀장님 밑으로는 직급 없이 다 선배라고 부르고. 그런 분위기가 나는 좋았나 봐.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하고 싶은 분야를 찾다 보니 유학을 와버렸네?
사진 2 한창 날씨 좋던 날, 언니의 독일 집에서
동생 / 언니는 대학원을 외국으로 갔잖아. 생소한 독일어를 배우고 서류들을 차곡차곡 준비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해 보였어. 그래서 나도 그때부터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가는 쪽으로 마음이 좀 더 기울었어. 대학원에서 간호학을 전공할 수도 있지만, 나는 호스피스를 배워보고 싶어. 사실 호스피스는 한국보다는 스위스나 독일이 더 잘 되어있을 테고, 유학을 가면 지금보다 넓은 시각을 배우고 이 분야를 더 잘 배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
언니 / 내가 그런 영향을 줬는지는 몰랐어. 나는 우리 둘 다 해외 생활을 해 봤다는 게 좋아. 서로 말하지 않아도 해외생활이 어떤지 잘 알잖아. 밖에서 보는 거랑 실제는 좀 다를 수 있다는 거.
동생 / 사실 나는 아랍에미리트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독일 생활이 좀 더 우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유럽은 복지도 좋고 문화 인프라도 풍부하니까. 그런데 처음 언니를 만나러 독일에 갔을 때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라는 걸 느꼈어. 한참 사람에게 크게 데고 독일에 간 거였는데, 언니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누군가는 그걸 듣고 무심하게 “야, 그거 한국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야.”라고 할 수 있잖아. 그런데 모국어와 모국에 대한 감정 같은 걸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언니 말대로 서로의 상황을 그냥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어. 언니랑 나는 원래 성향도, 생각하는 것도 다른데 말이야.
언니 / 맞아. 그건 그래.
동생 / 그때는 서로 진짜 공감하고 있다고 느꼈어.
사진 3 아랍에미리트에서 동생이 처음 구한 집
돌아간 너와 남은 나
언니 / 우리 둘 다 각자의 해외생활을 거쳐 나는 독일에 있고, 너는 한국으로 갔지. 독일에 처음 나올 때만 해도 5년 안에 언어를 배우고, 졸업하고, 일도 하다가 한국에 귀국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어. 근데 졸업하는 데에만 거의 5년이 걸렸네. 한국행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나름의 삶이 생겼고, 가족 모두가 이 삶에 만족해서 독일 생활이 계속 이어진 것 같아.
동생 / 내가 고등학생 때 미국에 처음 갔을 땐 나를 맞아준 백인가족 호스트 덕분에 편하게 지냈어. 그리고 대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다시 미국에 갔을 때는 인종차별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해외생활이 쉽지 않다는 걸 처음 느꼈어. 그전에는 미국에 가면 진짜 잘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다 좋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은 거지. 아시아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는데, 마침 아랍 에미리트 파견 공고가 떴어.
언니 / 그렇게 가게 된 곳에서 ‘나는 어쨌든 한국에 다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잖아.
동생 / 여행 중이던 독일인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 그 사건이 나에게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왔어. 그분의 죽음이 너무나도 객사처럼 보였거든. 준비되지 않은 마무리였던 것 같아.
언니 / 그 경험이 네가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연결될 수 있겠다. 그런데 모든 죽음이 잘 준비될 수는 없잖아.
동생 /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분의 경우 아픈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어. 삶의 마지막을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갑작스럽게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너무 어렵게 했어.
언니 /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구나.
동생 / 외국에 나가서 살면 평생 이방인이라서. 한국사람들과 지지고 볶아도 그 안에 있는 게 좋겠다고 그때 생각했어.
사진 4 캠핑으로 유명한 아랍 에미리트 라스알카이마 산으로 소풍 가는 길
K장녀의 역할은 누구에게?
언니 / 독일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잠깐이라도 아이를 맡아 줄 가족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때가 있었어. 엄마에게 전화 걸었는데, 거기에 너와 조카들이 놀러 가 있으면 금방 전화를 끊었던 기억도 나. 이곳에서 아이를 기르면서 엄마에게 기댈 수 없다는 점이 마음 아팠거든.
동생 / 나도 언니가 불편해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느꼈어. 내가 있는 걸 보면 빨리 끊더라고. 속상했을 것 같아. 그런데 나도 편하게 지내지는 못했어. 엄마가 밥 한다고 하면 숟가락을 놓아야 할 것 같고, 자라고 해도 발 뻗고 못 자겠고, 육아 선배님인 엄마의 잔소리도 들어야 했거든. 하지만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온 이유에는 가족과 가까이 살고 싶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내가 선택한 상황을 수용하기로 했던 것 같아. 주어진 왕관의 무게를 견딘다는 느낌으로.
언니 /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엄마 옆에 있어서 좋겠다’를 직접 겪을 수 있었던 것처럼, 너의 그 ‘왕관의 무게’를 같이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네가 나중에 혹시 모르니 장례 절차를 미리 알아둬야겠다고 했잖아.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 대신 장녀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동생 / 장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누가 지금 위독하니 바로 다 모여!”가 안되잖아. 언니가 한국에 빨리 온다고 해도 하루 넘게 걸릴 테고, 와도 나보다 더 모를 텐데. 그렇다고 남동생이 알리도 없고. 내가 모르면 모두가 우왕좌왕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나는 삶의 마지막 정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장녀로서는… 아, 그런 거 한다. 엄마 아빠 여행 갔을 때 문 앞의 택배를 집으로 넣어주는 거.
언니 /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사진 5 언니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아직 작았던 아이들과 나란히
가족과 함께라면
동생 / 이제 언니도 독일에 산 지 오래됐네. 어떻게 보면 언니 삶의 3분의 1을 독일에서 살아온 거잖아. 나는 종종 ‘해외에서 좀 더 견뎌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어. 기회가 있으면 다시 나가보고도 싶고.
언니 / 왜 다시 나가고 싶어?
동생 / 앞선 경험을 통해 이제 해외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작아진 것 같아. 어려움도 이미 알고 있지만. 장점도 많으니까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기회를 주고 싶어.
언니 / 어떤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
동생 / 세상에 눈뜨는 것. ‘한국이 다가 아니구나, 다른 모양의 삶도 있구나’ 하고 깨닫는 것. 우리 때는 한국에서 “공부를 잘해야 해.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해.”라는 말을 계속 들었다면, 미국에서는 “네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해. 네가 잘하는 걸 찾아.”를 배우는 것처럼. 독일은 어때?
언니 / 아이가 학교에서 성적을 받아오기 시작하니까 스트레스가 좀 있네. 내가 만약 한국에서 아이를 키웠다면 공부를 엄청 시켰을 것 같아. 나는 아이가 자라는 그 환경에서 잘하는 아이면 좋겠나 봐. 지금까지 내가 본 독일은, 공부를 좀 못하는 아이더라도 나중에 괜찮은 사회 구성원이 되면 잘 자랐다고 보는 것 같아. 자기 의견을 어른한테도 잘 이야기한다든지, 호불호를 명확하게 알고 표현한다든지, 다름을 구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든지, 환경에 관심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 이런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 있으니 우리 아이들도 이 사회에서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신경 쓰는 편이야. 물론 성적도 잘 받아오면 너무 좋겠지.
동생 / 아이들이 좀 더 자란 뒤 두 번째로 언니가 있는 독일에 갔을 때, 언니네 첫째가 다니던 유치원에 가서 우리 아이들도 같이 하루를 보냈잖아. 며칠 전 아이들이랑 점심 메뉴 이야기를 하는데, 첫째가 갑자기 그때 독일 유치원에서 빵에 뭘 올린 걸 점심으로 먹었다고 이야기하더라고. 점심 먹는데 언니네 둘째가 위 층에서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했다고도 하고.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독일에서는 아플 때 “아우아”라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아우치”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아야”라고 한대. 그 잠깐도 아이들에게는 크니까. 정말 좋은 경험이 됐어.
언니 / 이제는 우리에게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이 해외에 나가고 한국에 들어가는 걸 상상하면, 우리가 해외에 가기로 했던 결정의 무게와 비슷하거나 더 무겁게 고려하게 돼. 언젠가 너희 아이들이 독일에 오고 우리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그렇게 또 이어지면 좋겠다.
(사진 5 캡션 없이)
LIFE
우리가 다른 궤적을 걷는다 해도
에디터 전예진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듯, 우리도 오랜 시간을 따로 걸어왔다. 문득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자매의 해외 생활과 지금의 삶. 간호사 동생과 건축가 언니, 두 자매의 이야기.
